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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시작은 처절한 실패 부터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린 남자>로 소개한 뉴욕타임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한 박찬욱 감독은 영화 동아리에서 본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을 보고 감독이 되길 결심했다고 한다. 비디오 가게 뒷 방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배달도 하며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실패한다. 1992년 당시 서른 이라는 이른 나이에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영화감독 데뷔를 했으나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실패하였다. 심지어 주인공은 가수로 유명했떤 이승철의 데뷔작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두번째 작품인 <삼인조> 또한 흥행과 비평 모두 실패라는 참담한 현실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오른 박찬욱 감독은 영화 감독이 아닌 영화 평론가가 되었다. 재밌게도 영화 평론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달필로 유명했던 박찬욱 감독 아니, 박찬욱 평론가는 1994년 출판한 평론집 <영화 보기의 은밀한 매력/비디오드롬>으로 영화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2005년 <박찬욱의 오마주> <박찬욱의 몽타주>가 상당한 판매고를 올렸다. 유명해진 평론가 박찬욱 감독은 여전히 영화감독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평론에는 대부분 외국 영화이었는데 그 이유가 다시 감독으로 데뷔하기 위해 한국 영화에 대해선 평론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동료 감독이었던 이두용, 김기영에 대한 애정어린 평 정도가 유일하다. 

 

평론가 박찬욱에서 감독 박찬욱으로 다시금 떠오른 계기는 자신을 잘 안다는 것에서 부터 였다. 그는 자신이 각본을 잘 쓰지 못한 다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작가를 영입했고, 작가 이무영과 '박리다매'라는 이름의 듀오 팀을 결성했다. 그렇게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평론가들의 찬사와 흥행 모두 성공 시키며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가는 여정의 시작을 알렸다. 2002년 영화인 <복수는 나의 것> 이전에,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의 감독을 맡았지만, 이는 제작사 명필름에서 충무로에 전설처럼 돌아다니던 시나리오의 연출을 한 것 뿐이다. 물론 이 또한 대단한 일이지만, 오리지날 박찬욱 감독의 시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찬욱 감독하면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그리고 <헤어질 결심>까지 생각이 난다. 작품들 모두 호불호가 없을 수 없다. 그렇다, 그는 호불호가 심한 영화감독이지만 세계가 인정했고 명실공히 대한민국 대표다. 아무리 호불호가 있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깊이의 세계가 차원이 다르다면 문제는 없다. 이런 호불호는 그가 영화 감독이 되야겠다고 결심한 영화 때문에 그런것 같다.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영화 동아리에서 본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 말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으스스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혼자 보거나 쉽게 접근하기 어렵고 매니악스러운 부분들로 구성되어져 각잡고 봐야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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